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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화훼정보화마을 상예정보화마을 무릉도원정보화마을 수산정보화마을 알토산정보화마을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180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제주도의 옛 지도에 의하면 오조촌(吾照村)이 그려져 있다. 현재의 지도와는 정반대로 북쪽에서 남쪽을 보듯 그린 이 지도는 산세 등을 사실적으로 그리려 한 것이 특징이다. 정의현과 함께 겹으로 둥그런 성까지 표시된 고성촌(古城村)은 우연히도 현재의 속칭 안가름 자리와 일치한다.
안가름은 일명 관가름이라고도 하거니와 조사팀은 이번에 이 안가름의 절터에서 정교하게 깍은 주초석(柱礎石) 1기와 섬돌 1기, 돌로 만든 정교한 종추(鍾錘) 1개, 그외에 숱한 기왓장과 고려에서 조선조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자기 파편들을 찾아냈다. 또한 현재 오조리 마을의 남쪽 논밭의 둑에서 석곽(石槨)의 덮개를, 마을 안과 안가름의 기왓골에서는 역시 주초석들을 찾아냈다. 이런 유물들은 대략 사방 1km쯤에 무수히 널려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에 제작된 〈탐라지〉의 정의현 수전소(水戰所) 부문에는 서귀포와 함께 열운포(閱雲浦)의 기록이 나온다. 현재는 대개 없어졌다는 수전소 중 열운포(현재 온평리)의 기사를 풀어보면 정의현 동쪽 20리에 위치해 있으며, 판옥전선(板屋戰船) 1척과 대변량(待變粮) 1석이 있고, 사수와 격수(格手) 아울러 81명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수전소와 과거 오조포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 지금은 이 포구로 옮겼다는 기록이 말미에 첨가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온평리에 수전소가 있기 전 오조포에 있었음이 입증되었다.
현재의 성산수고 동북쪽 바닷가에는 오조 연대의 기초가 남아있고, 여기서 식산봉쪽으로 바닷가를 끼고 성곽의 흔적이 있으며 성산수고 동녘 바로 바닷가의 밭부터 자기와 기와의 파편이 무수히 널려 있는데 이는 수전소의 터전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이 안가름 일대는 과거에 수전소와 아울러 판가였는데 그것이 재난이었거나 편리한 지형을 좇아 새가름 쪽으로 옮겼을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성산읍 일대에는 고성과 수산, 짐수막 같은 지명이 나오며 삼별초의 애월읍 항파두리 부근에도 역시 고성, 수산, 짐수못이란 지명이 나온다. 영광부사 김수(金須)는 전라안찰사의 명에 따라 삼별초군이 진도 쪽으로 밀려 내려옴에 앞질러 200명의 병졸을 인솔하여 본도에 파견되었던 장수로서 전투 중 사망했다는 기록이 나오거니와, 이와같은 지명의 일치를 무심히 넘겨버리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이곳에 삼별초 이전에 이미 사람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배제하기 어려우며, 역사의 현장으로서 중요한 장소임이 확실하다.
또 한 안가름의 고장남밭에는 제주부씨 도선묘인 부유염(夫有廉)의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의 주인은 1484년(성종 14년)에 태어나서 아들 하나를 낳았으며, 사망한 연월일은 미상이다. 그의 탄생은 지금부터 503년 전, 그의 아버지 삼노(三老)의 묘 역시 여기서 머잖은 구좌읍 하도리 목장 안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들이 이 부근에 살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이 무덤에서 밭 두어개를 사이에 두고 은진송씨의 입도조인 동보(東寶)의 무덤이 있다. 그의 자손은 지금까지 오조리에서 11∼12대를 살아오고 있다. 이같은 근거에 따라 옛마을인 안가름의 형성을 적어도 450년 이전, 새가름 도 350년쯤 전에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한다.
정의현이 설치된 것이 1416년(태종 16년)이었으며, 당초 고성리에 성을 쌓았다가 1423년(세종 5년) 현재의 성읍리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의 고성리가 옛 지도상의 위치(안가름)일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성읍리로 옮기게 된 이유가 우도 인근에 왜구의 침범이 빈번했던 탓이라 하니, 식산봉에 노람지를 덮어 산 자체를 군량미로 보이게 하였다는 설이 전혀 허황되지 않다. 거기다 이 전설은 항파두리 토성 주변에 재를 뿌리고 말꼬리에 비를 매달아 달리게 하여 먼지를 충천케 함으로써 관군의 눈을 현혹케 하였다는 삼별초에 관련된 이야기와도 일맥 상통하는 데가 있다.
지금도 안가름에는 절터, 창(倉)터왓, 연대밋, 마재포(馬載浦) 등의 지명이 있으며, 특히 마재포는 맞은쪽 성산포 일출봉 밑의 수매밑(受馬밑)과 걸맞는 데가 있다. 말을 싣고 부리고 했을 가능성을 짐작케 한다. 또한 고장남밭 옆의 불미술에서는 무늬가 다양한 기왓장이 다수 나오는데, 이는 식산봉의 옥년산발형(玉女散髮形) 전설에 나오는 부씨 총각이 불미대장(대장장이)이었다는 내용과 아울러 풀무터였다는 유추를 낳게 한다.
거기다 이 부근에서 출토되는 고려자기, 조선자기의 파편이나 기와의 문양들이 제주의 일반 촌락 가옥구조나 기명류와는 전혀 걸맞지 않다는 데서, 이곳에 살았을 사람들이 일반 제주 섬사람들과는 달랐을 것이라는 사실도 짐작케 한다.
또한 이곳에는 터우(떼배)와 함께 유독 도내의 다른 지방에 없는 덕판배(수송선인 듯), 싸움판배(젖선)등 선박의 종류가 다양하여(덕판배는 60여년 전까지 존속돼왔다고 함.) 조선소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주군디물, 병문기(兵門基), 수전(水戰), 짐수막(金須幕) 같은 지명은 특히 군사와 유관한 것들로, 이 지역 과거의 성격을 알아보게 하는 것들이다.
옛부터 마을에는 주로 신천강씨, 제주고씨, 김해·광산김씨, 밀양박씨, 제주부씨, 은진송씨, 군위오씨, 청주한씨, 연주현씨, 남양홍씨, 평강채씨 등이 거주해 왔으며, 입촌성씨는 600여년전 은진송씨로 전해지고 있으나 최근에 전입되는 성씨는 매우 다양한 추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