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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소개

마을약사

마을약사

용설달리 설촌
現 조수리는 지금으로부터 약 380여 년 전인 서기 1610년에 속칭 용선달리에 전주 이씨, 몽빈씨 일가족의 처음에 입주한 것이 마을의 설촌(設村)의 시작이라고 한다. 당시의 설촌(設村)하신 분은 전주이씨이시다. 이씨시조의 휘, 이공, "韓"자인데 사공공의 30세손이며 즉, 이씨 22세 이태조 ~ 이성계의 9세손인 기빈씨가 서기 1610년 3월에 제주 목사(牧使)로 도임(到任)당시에 목사의 종제(從弟) 이신 휘 이공 몽빈씨(서기 1528년 무자생후(戊子生後)에 가선대부(嘉善大夫)임)와 그분의 배우 밀양 박씨(乙亥生) 그리고 이분의 자(31세손) 휘 이공 오헌(五憲-서기 1547년 정미 8월 5일생)씨(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임명됨)등이 종형(從兄)과 동반입도(同伴入島) 하여 동거생활 중 어느 날 종제(從弟) 몽빈씨 일가족이 행방불명되자 종형(從兄) 기빈씨는 10개월 후인 1611년 1월 퇴임(退任)하고 입경(入京)하게 되자 종제(從弟) 몽빈씨 일가족이 은거정착(隱居定着)한 곳이 속칭: 용선달리라는 지경(地境)으로서 이때부터가 現 조수리의 설촌(設村)의 시초라고 한다.
이 곳에 은거정착하면서부터는 부인 박씨는 늘 아들에게 공부도 가르쳐 주고 들에 나아가 사냥하는 일, 창을 쓰는 법 등의 범절(凡節)을 가르쳐 주었고, 모든 예절을 가르쳐서 사람의 됨됨을 길러주었으며 농사일, 나무열매 따기, 야수를 잡아서 식용 등을 하면서 새로 이주하는 씨족과도 예의 범절을 지키고 지도하여 주었다.
이 분들은 이 곳에서 기거하면서 농토도 확보하였고 부지런히 농사를 짓고 야수를 잡아서 가축으로 만들어서 완전한 생활근거지가 되었다. 뒤에 들어온 사람들도 농토를 확보하는데 힘쓰고, 개개인들은 농토를 마련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과목(감나무, 유자나무 등)을 심어서 과원(果園)을 조성하고 가꾸었다.
그 후 얼마 없어서 성과(成果)하기 시작하였다. 과목에 열매가 달리게 된 뒤부터는 매년 관가에서 사람을 보내어 나무마다 열매를 세어간다. 가을이 되면 또 관가에서 사람이 와서 처음 수효대로 따서 진상(관가에 바침)을 해야 한다. 1년 내내 가꾸어온 과주(果主)들은 단 1개도 먹지 못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그곳에는 몇 개의 감나무가 있다. 그 후 타(他)성씨들이 이주해 오니 부락이 커지고 외롭지도 않았다. 그 후 얼마 없어서 아들이 성장하자 제주 고씨 의규씨의 딸과 결혼해서 이곳에서 5世가 기거했다고 이씨의 가사록에 기록되고 있다.
속칭: 용선달리는 해발 250m 정도 되는 산악지대이면서도 기후가 따뜻하고 농토가 오목지며 평평(平平)고 기름져서 농사짓기에 편리하였으며 서방(西方)으로 자연석과 크고 작은 오름으로 둘러 싸여져 있고, 식물과 야수(野獸)가 많아서 식물의 열매로는 식용물로 이용하기도 하였고, 야수(野獸)도 식용물로 이용하였다.
해가 갈수록 이주민이 많아지자 식수난이 되어서 속칭: 구멍목이 물을 중심으로 남, 북으로 물통을 파서 일부는 식수로 이용하고 일부는 가축의 급수로 이용하였다.
그뿐 만 아니라 인구가 많아지자 처음에는 자연토굴 또는 반석 밑에서 살았으나 얼마 후부터는 주위에 있는 수목(樹木)을 베어서 제각기 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당시에 도구가 없는 때라 돌, 도끼 등으로 나무를 베어다가 집을 짓는데 대개가 통나무집이 많았으나 해가 갈수록 도구가 쇠붙이로 나와서 집 짓는 데나 가구류(도고리, 남방아 , 국자, 밥자, 나막신 등) 만드는데도 손쉬워졌다고 한다.
전주 이씨들은 이곳에 설촌(設村)하고 처음에는 토굴서 살면서 부근의 땅을 개척하고 농사도 짓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여러 곳에서 타(他)성씨들이 모여와서 살게되면서부터는 첫째는 집 문제가 되어서(김씨, 고씨, 부씨 등) 이 분들은 먼저 부근의 수목(통나무)을 베어다가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때에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인심도 좋고, 서로 믿고 이웃 간에는 어떠한 일이 있으면 동내 사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여들어서 일을 거들어 주었고 서로 나누어서 일을 하게 되었다. 집을 짓는 데에는 나무를 베는 사람, 운반하는 사람, 나무를 다듬는 사람, 집 모양을 짜는 사람, 돌 쌓는 사람(속칭: 흙질하는 일)등 여러 일을 분업으로 수일간이면 집을 완성하게 되었다. 다음에 또 집 없는 사람을 택하여 매일 같이 집을 지어 새로 들어온 씨족들도 모두 자기 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기후가 좋은 곳에 집을 지어도 예나, 지금이나 제주도에는 바람이 많고, 강한 계절풍과 여름에 태풍이 심하게 불자 지붕을 날리지 않도록 띠(새)로 서 줄을 놓고 지붕을 단단히 동여메곤 하였다. 처음에는 칡넝쿨로 집을 동여매다가 넝쿨이 점점 없어지자 띠밭을 만들어서 띠줄로 지붕을 억는 법이 그대부터 시작된 법이며, 서기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제주도 전역에 초가집들이 많았으나 70년대부터는 지붕개량으로 초가집이 거의 자취를 감추고 있으나 각 마을마다 2 ~ 5동 정도의 초가집을 볼 수 있다.
두 번째의 문제점은 사람이 많이 모여서 살게 되고 가축도 기르게 되자 물 문제가 발견되었다. 처음 설촌(設村)당시에는 사람도 얼마 안되고 소수 족이여서 속칭:구멍목야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식수를 이어가는 데에는 큰 지장을 받지 않았다. 이 구멍목이 물은 땅속으로 흐르는 물이었다.
설에 의하면, 한라산(물장우리)에서 땅속으로 스며져서 땅속 물줄기를 따라 흘러내려서 이곳에서 흐른다고 하며 여름철에 큰비가 오면 구멍목이가 터졌다고 해서 이곳에서 흐르는 물이 부근의 농경지일대를 물바다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물이 계속 흐리지 않기 때문에 식수난(食水難) 각 가축급수난(家畜給水難) 등이 생겼다.
이 곳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뜻이 같아서 이곳 구멍목이를 중심으로 해서 부근에 물통을 파기로 의논이 되었다. 그래서 구멍목이를 가운데 두고 남북으로 물통을 파게 되었다. 남쪽에 3개 등 6개의 물통을 팠는데 중간에 인도를 만들고 다니게 되었다.
남, 북 양쪽에서 인도에 접한 2개 물은 길가의 물이 모여들게 됨으로 이 물은 가축의 급수로 또는 사람들이 더운 때에 목욕하는 물로 사용키로 하고 그 안쪽의 4개의 물통은 식수용으로 사용하였으며 지금도 그곳에는 6개의 물통은 있으나 각 부락마다 심정굴착으로 인하여 위생수의 공급으로 현재 이용은 안하고 있으나 그 물통만은 옛 조상들이 넋을 기릴 만하다.

설촌시기는 약 1610년 이조명종때 전주이씨가 속칭 용선달리라는 곳에서 은거한데서 설촌유래를 찾고 있으며,

양씨, 진씨(사위와 장인)가 정동이로 이주하여 그루 여러 씨족들이 모여옴에 따라 마을이 커지게 되고 리명을 '조호수리'라 불리우다 1820년 조수리로 개명하였음.

그후 1974년 4월 행정구역 조정으로 붉은 못은 조수 2리로 한양동, 대동, 중동하동, 신동은 조수 1리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음.

역대이장

역대이장
順 位 姓 名 在 任 期 間 연 락 처
1 김우경(金友京) ∼ 1952. 3. 12
2 조문표(趙文杓) 1952. 3. 12 ∼
3 이중화(李重華) 1955.12 ∼ 1960. 6
4 조성용(趙性容) 1960. 6 ∼ 1961. 7
5 문병선(文柄先) 1961. 7. 4 ∼ 1962. 3. 1 773 - 0484
6 조귀하(趙貴廈) 1962. 3. 1 ∼ 1964. 10. 12 773 - 1086
7 김대중(金大中) 1964. 10. 12 ∼ 1966. 7. 13
8 이경성(李璟成) 1966. 7. 13 ∼ 1970. 7. 20 772 - 4224
9 홍희봉(洪喜奉) 1970. 7. 20 ∼ 1972. 2. 21 773 - 0897
10 양응순(梁應順) 1972. 2. 21 ∼ 1974. 12. 16 773 - 0391
11 홍성보(洪成輔) 1975. 1. 1 ∼ 1976. 1. 31 773 - 0910
12 홍승임(洪乘任) 1976. 2. 1 ∼ 1977. 2. 19 773 - 0913
13 고성숙(高成淑) 1977. 2. 19 ∼ 1978. 3. 1 773 - 0920
14 조태경(趙太京) 1978. 3. 1 ∼ 1979. 2. 1
15 김성홍(金晟洪) 1979. 2. 1 ∼ 1980. 3. 22 773 - 0914
16 김소정(金昭晶) 1980. 3. 22 ∼ 1980. 12. 1 773 - 1189
17 홍희봉(洪喜奉) 1980. 12. 1 ∼ 1983. 2. 28 773 - 0897
18 문기완(文基完) 1983. 3. 1 ∼ 1985. 2. 23 773 - 1977
19 문명선(文明鮮) 1985. 2. 23 ∼ 1987. 2. 2 773 - 0912
20 조웅세(趙雄世) 1987. 2. 2 ∼ 1991. 1. 22 773 - 0994
21 김성관(金成寬) 1991. 1. 22 ∼ 1994. 2. 1 772 - 3489
22 윤승철(尹丞哲) 1994. 2. 1 ∼ 1996. 1. 31 773 - 0998
23 고순천(高順千) 1996. 2. 1 ∼ 1998. 1. 29 773 - 0553
24 김한석(金漢錫) 1998. 1. 30 ∼ 2000. 1. 15 773 - 0906
25 이덕오(李德五) 2000. 1. 16 ∼ 2006. 1. 15 773 - 0980
26 김창화(金昌和) 2006. 1. 16 ~ 2010年1月15日 773 - 0385
27 김현진 2010年1月16日 ~ 2012年1月17日 773 - 4364
28 김대유 2012年1月18日~ 현재 010-5722-9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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