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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미2리장 열전
한 사람의 역사, 한 가정의 역사, 한 마을의 역사, 한 지역의 역사들이 모여 국사가 된다. 향토사가 없으면 국사는 성립되지 못한다.
우리마을의 전기 가설의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하는ᄂ 향토사를 모르면서 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가정의 내력, 우리 마을의 내력부터 알고 국가의 내력을 알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지방자치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위미의 역사는 설촌의 역사를 차치하고라도 리의 연표나 리장의 이름, 그리고 리장의 업적도 제대도 정리되어 있지 않다. 마을의 역사를 모르면 마을의 미래를 예측되는 통찰력도 나올수가 없다. 그래서 마을의 역사는 그 지역의 가장 값진 자산인 셈이다.
<위미2리 소식지 >가 리장열전을 통해 위미2리의 역사를 찾아 나서게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리장 열전의 게재 순서는 생존해 있는 리장 가운데 재직 연대별로 다루기로 했다. 작고하신 리장들의 업적도 별도의 기회에 언급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리장당시의 기록 부재로 인하여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 자기의 밭을 팔면서까지 헌신했던 리장들.
그분들의 역사, 그 분들의 명예가 지난 1991년 편찬됐던 <위미리지 >의 개정판 편찬때 만나게 되길 기약하면서 <리장열전 >을 시작한다. <편집자주 >]
-린 집,열린 마을을 위한 소식지 두.번.째-
4.3때 소실된 지적도를 복원한 오도영
4.3때 소실된 지적도를 복원한 오도영
지귀도가 위미리에서 바라볼 때 보다 가깝게 다가서는 망장포구, 그 포구를 끼고 보타사가 있고, 그 절엔 그 스님 내외가 산다.토요일 오후 편집진은 포구의 그늘에서 그 스님과 마주 앉았다. 그 노스님이 바로 지금으로 부터 42년 전인 1955년도에 위미2리 리장을 역임했던 오도영씨다. 오씨는 앞바다의 파도껍질을 벗기듯 리장 당시의 일들을 회상하면서 잠시 감회에 젖는다.
오씨가 선거에 의하여 리장으로 당선되던 시절은 <4,3 >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지만 여전히 입산이 금지될 때였다. 마을 집들은 어느 정도 복구가 되었지만, 소실된 공공시설과 문서 등을 북원하는 것이 시급한 현실적 과제였다.
우선 지적도 제작이 가장 큰 문제였다.밭의 경계가 불문명하기 때문에 재산권에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위미1리장이었던 현태식씨와 함께 위미리 지적도를 새로 만드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때는 복사기가 없었기 때문에 일일이 수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애향심이 불타는 고등학생 7-8명이 동원되었다. 이들에게 지급되는 보상금이라고 해 봤자 점심값이 고작이었다. 학생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4개월간에 위미2리 지적도가 제작될 수 있었다. 이렇듯 위미리민들의 애향심은 어려울때 일수록 더욱 뜨겁게 발휘되곤 하는 것이 마을의 전통이다.
마을은 학교의 비품을 마련해 주는 일에 나섰다.<4.3 >으로 소실된 학교는 세워졌으나 책,걸상을 마련해 주는 것도 주민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오도영 리장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설득하고 이해를 구하며 모은 기금으로 후세들의 면학의 기틀을 다질수 있었다.
동(洞)과 동간의 길이 확장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당시는 길이라고 해봐야 우마차가 겨우 지나갈 정도였다.
훗날 새마을 사업으로 도로 확.포장 할때에도 지주들의 허락을 받는 것이 책임자들의 고역이 었지만, 그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오도영 리장은 지주가 동의할 때까지 계속 찾아갔기 때문에 독한 리장이라는 닉네임을 얻기까지 했다. 도로 확장사업은 동별로 인원이 동원되었다. 그때 확장된 길은 뒤통모르 4거리에서 남쪽 폭낭 3거리,위미2리 어촌계 복지회관 옆을 통과하는 어음골목에서 동쪽으로 곤냇골, 서쪽으로 앞골세, 세천동 동백나무 군락에서 썩은 빌레까지 였다. 그때 리장을 지내면서 개인돈도 많이 쓰지 않았느냐는 편집자의 물음에 "고소까이(용돈) 좀 썼주"라는 짤막한 대답으로 사재를 털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오도영리장은 <4.3 이재민구호곡 >의 저장을 위하여 상사(향사-현재 위미주유소 동쪽 반대편)에 손수 흙질을 하며 <곳간 >을 지었고 산에서 가구당 3구씩으 벗나무를 캐어 오도록하여 가로수로 심었다. 오도영리장은 말한다. 내가 리장을 맡을 당시 보다 <4.3 >때 리장들이 더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그렇다.
지역의 책임자들의 이러한 헌신과 희생이 밑거름이 되었기에 오늘의 위미2리가 번영의 터전을 세울수 있었던 것이다.
위미2리 전기가설의 주역, 김봉호
1967년 12월 4일, 이 날은 위미마을이 설촌딘 이래 가장 경사스런 날로 기록될 것이다. 촛불이나 회화(호야), 그리고 각지불 시대에서 전기불 시대를 연 날이기 때문이다. 1887년 경복궁내 건청궁에 첫 점등이 된지 80년, 1926년 <제주전기주식회사 >가 설립되어 제주에 전기가 처음 공급된지 41년, 그리고 1943년 서귀포수력발전소(천지연)가 신설되어 서귀포 지역에 점등된 지 24년만에 비로소 위미리에도 전력이 공급되기 시작한 것이다.요즘 같으면 서울에서 문명의 이기가 시작되면 몇 개월, 또는 몇년 안에 위미땅까지 도입되지만, 무려 80년만에 전기가 되입된 것은 그만큼 역사발전의 수레바퀴가 더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송이의 국화꽃고 그냥 그렇게 가만히 있어도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치고, 무서리가 내려야 하듯이, 위미땅에 전기가 첫 점등이 되기까지에도 이에 못지않은 희생과 정열이 수반되어야 했다.
'김봉호 리장=전기가설의 주역'으로 리민들의 가슴에 각인 돼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김봉호씨는 마을주민들으 추천에 의해 개발위원회에서 리장이 되었다. 그때의 나이는 33세였다.
그렇다면 전기가설에 대한 논의를 구체화 시켜야 할 막중한 시기에 30데 초반의 청년을 리장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주민들과 개발위원들의 속내는 무었이었을까? 그것은 김봉호씨가 남제주군에서 7년동안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다져놓은 인맥과 행정경험, 그리고 추진력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위미리 전기가설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포부로부터 리장직의 첫단추를 끼우기 시작했다.
위미리전기가설추진위원회는 양경생위원장, 위미1리장 현우만,2리장 김봉호로 구성되어 삼각편대를 이루었다.우선 재일동포들의 기금을 끌어 들이는 것이 과제였다. 그래서 재일동포들이 고향을 찾아올 때마다 환영회를 베풀면서 일본의 교민들에게 애향의 사업에 대한 동참 협조를 부탁했다.
당시는 제주의 어느 지역에서나 재일동포들이 대한해협을 뛰어 넘는 애향의 손길이 펼쳐질 때여서 재일동포들의 정성이 얼마나 모아지느냐하는 것이 전기 가설의 성패를 가늠할 정도였다.
이무렵<在日濟州間發協會 > 방문차 일본에 건너갔던 현오봉 국회의원이 위미출신 재일동포들의 모임인 <相互會 >를 방문, 위미리 주민들의 숙원인 전기가설 문제를 협의 함으로써 재일동포들의 성금이 모아지는 물꼬를 텄다.
이렇게 해서 재일동포들의 성금 965만원과 자체자금 등으로 위미리에 전기문명의 새 역사를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위미초등학교에서 개최했던 전기가설 점화식에는 제주도부지사를 비롯 권동주 남제주군수 강문준서귀포경찰서장,재일동포,리민 등이 참석하여 걸궁이 어우러지는 속에서 위미역사에 최대의 감격의 순간을 누리게 되었다.
김봉호 리장의 가슴속에는 아직도 1967년 12월 4일의 대역사가 흑백사진처럼 간직돼 있다. 김봉호 리장은 전기가설 사업 이외에도 과거 공직생활의 인연으로 남제주군 관내에 1군데 배정된<우수급수장 >을 배정받아 시설하였는데 웃목장<우마급수장 >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공사 자재를 실은 트럭 소리가 이곳에 울리기는 처음이었다.
2년여의 위미2리장 재직을 마치면서 서귀포로 보금자리를 옮긴 김봉호씨는 현재,노인복지에 힘쓰고 있다.
위미2리 근대화의 기수, 임의호 리장
위미2리 근대화의 기수, 임의호 리장
당시, 1970년 10월부터 시작한 새마을 운동은, 1971년 9월 19일 전국 시장, 군수 비교 행정회의에서 농촌근대화의 불씨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나갈 것을 결의하여, 범국민 운동으로 점차 불태우고 있던 시기였다.
한마디로, "근면.자조.협동"이라는 새마을 운동은 조국의 근대하는 물론, 농촌의 근대화를 이룬 성공적인 경제부흥운동이었다.
평소 근면 성실한 품성과 후덕한 인품으로 지역사회 내.외부에서 신망이 두터운 임의호씨를 리장으로 봉직시킨 것은, 새마을 운동의 영향을 받아, 마을 근대화를 이루고자하는 지역주민들의 여망에 의해 이루어졌다.
남제주군 리개발위원회 조례(조례 제271호)에 따라 리행정에 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하여, 주민참여를 통해 지역사회발전에 기여할 목저긍로 1972년부터 소위,리개발위원회를 설치 운영하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지역주민들의 여망에 부응이라도 하듯, 임리장은 재임기간동안 리개발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하는 한편, 향리발전과 주민숙원사업 해결에 역점을 두어 추진해오면서 격의 없는 주민유대강화에도 힘썼다.
"큰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불면, 지역 농작물이 피해나 보지 않을까, 어느 집에는 무슨 일이있었더라, 내일은 그집에 찾아가 봐야지."노심초사 했고, 동네 어르신네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날이 새는 줄 모른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지금이나, 이전이나 리장의 자리가 어디"종사합네"하면서 큰소리나 칠 수 있는 자리인가? 머슴 중에는 상머슴이라고 표현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로 가정일은 묻어두고, 향리일로 돌아다니는 그야말로, 부평초 같은 기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임리장은 "부지런한 공은 하늘도 감복 받는다."는 옛말도 있듯이,이렇게 근면 성실하게 리정을 이끌어 온데다가 통솔력과 친화력이 강하여 리민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
특히 새마을사업은 그 자체가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동참을 하지 않으면 어려운 만큼, 물자나 시설이 부족했다.
농로 확.포장사업이 그러하고, 지붕개량사업이 그러했다.
더욱이 ,일주도로 확장사업을 추진하면서 마을 주민들과 얼마나 많은 땀방울을 흘렸는지, 지금도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고생했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리장당시 의례간소화 때문에 마을 포제를 중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위미1리와 합동으로 마을 공동며지를 현재의 위치에 설치했고 전화가설 2차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당시 김봉세 새마을 지도자가 100만원의 상사업비를 받아, 대천공동창고를 지었으며 지금의 세천동과 대원하동 마을안길사업, 제2차 지적도 제작등 다양한 리 사업을 펴왔다.
특히, 현평만 전직리장이 추진해온 배머들에서 착공한 수도사업을 마무리 해오는 등 새마을 운동이 조기 정착될 수 있도록 주민계도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2년간의 리장으로 봉직하는 동안 지역주민들을 위한 무한대의 봉사는 오늘도 위미2리 노인회장직을 맡아 계속해 오고 있다.
백년대계의 초석을 닦은 오형택리장
1971년 3월5일, 이 날은 위미리민들이 교육에 대한 의지와 교육을 통해 향리발전을 기하려는<백년대계 >의 초석을 마련한 위미중학교의 개교일로서, 위미리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기념비적 사업이었다.
그만큼, 위미중학교 건립은 어렵고 힘들었다. 당시, 위미중학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위미고등공민학교"가 뜻있는 지역유지들의 의지를 모아 1950년에 인가를 받아 7년동안 위미2리 향사,위미1리 향사에서 청소년들을 교육했으나, 운영난으ᅩ 문을 닫느 srhcnd을 겪어야 했고, 그후 59년에는 위미1,2리 리장들이 중심이 되어 가칭<위미중학교 >를 위미1리 향사에 개설하여 운영했으나, 그 역시 4개월만에 운영난으로 폐쇄되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고충과 어려움이 있었기에 위미중학교 건립에 대한 리민들의 애향심은 1960년데에 들어서면서 다시 중등교육기관 설치운동을 벌였고, 1969년 2월28일 위미리민 총회는 위미중학교 설립 추진을 의결하고<위미중학교 설립기성회 >를 조직하였다.
이때에 위미2리장을 맡은 오형택 리장은 위미중학교 설립기성회 부회장의 직책을 맡아, 세대별10등급으로 나눈 기금을 모으는 일, 또한 혹통폭낭에서 중학교 입구확장사업에 편입된 토지주들을 찾아다니면서 흉금을 터놓고 대화를 나눔으로써 이해와 설득을 시켜 무상 기부채납토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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