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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리장 열전 2(김봉호리장)
작성자 관리자 조회 1,198 회

위미2리 전기가설의 주역, 김봉호

1967년 12월 4일, 이 날은 위미마을이 설촌딘 이래 가장 경사스런 날로 기록될 것이다. 촛불이나 회화(호야), 그리고 각지불 시대에서 전기불 시대를 연 날이기 때문이다. 1887년 경복궁내 건청궁에 첫 점등이 된지 80년, 1926년 <제주전기주식회사 >가 설립되어 제주에 전기가 처음 공급된지 41년, 그리고 1943년 서귀포수력발전소(천지연)가 신설되어 서귀포 지역에 점등된 지 24년만에 비로소 위미리에도 전력이 공급되기 시작한 것이다.요즘 같으면 서울에서 문명의 이기가 시작되면 몇 개월, 또는 몇년 안에 위미땅까지 도입되지만, 무려 80년만에 전기가 되입된 것은 그만큼 역사발전의 수레바퀴가 더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송이의 국화꽃고 그냥 그렇게 가만히 있어도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치고, 무서리가 내려야 하듯이, 위미땅에 전기가 첫 점등이 되기까지에도 이에 못지않은 희생과 정열이 수반되어야 했다.
'김봉호 리장=전기가설의 주역'으로 리민들의 가슴에 각인 돼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김봉호씨는 마을주민들으 추천에 의해 개발위원회에서 리장이 되었다. 그때의 나이는 33세였다.
그렇다면 전기가설에 대한 논의를 구체화 시켜야 할 막중한 시기에 30데 초반의 청년을 리장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주민들과 개발위원들의 속내는 무었이었을까? 그것은 김봉호씨가 남제주군에서 7년동안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다져놓은 인맥과 행정경험, 그리고 추진력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위미리 전기가설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포부로부터 리장직의 첫단추를 끼우기 시작했다.
위미리전기가설추진위원회는 양경생위원장, 위미1리장 현우만,2리장 김봉호로 구성되어 삼각편대를 이루었다.우선 재일동포들의 기금을 끌어 들이는 것이 과제였다. 그래서 재일동포들이 고향을 찾아올 때마다 환영회를 베풀면서 일본의 교민들에게 애향의 사업에 대한 동참 협조를 부탁했다.
당시는 제주의 어느 지역에서나 재일동포들이 대한해협을 뛰어 넘는 애향의 손길이 펼쳐질 때여서 재일동포들의 정성이 얼마나 모아지느냐하는 것이 전기 가설의 성패를 가늠할 정도였다.
이무렵<在日濟州間發協會 > 방문차 일본에 건너갔던 현오봉 국회의원이 위미출신 재일동포들의 모임인 <相互會 >를 방문, 위미리 주민들의 숙원인 전기가설 문제를 협의 함으로써 재일동포들의 성금이 모아지는 물꼬를 텄다.
이렇게 해서 재일동포들의 성금 965만원과 자체자금 등으로 위미리에 전기문명의 새 역사를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위미초등학교에서 개최했던 전기가설 점화식에는 제주도부지사를 비롯 권동주 남제주군수 강문준서귀포경찰서장,재일동포,리민 등이 참석하여 걸궁이 어우러지는 속에서 위미역사에 최대의 감격의 순간을 누리게 되었다.
김봉호 리장의 가슴속에는 아직도 1967년 12월 4일의 대역사가 흑백사진처럼 간직돼 있다. 김봉호 리장은 전기가설 사업 이외에도 과거 공직생활의 인연으로 남제주군 관내에 1군데 배정된<우수급수장 >을 배정받아 시설하였는데 웃목장<우마급수장 >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공사 자재를 실은 트럭 소리가 이곳에 울리기는 처음이었다.
2년여의 위미2리장 재직을 마치면서 서귀포로 보금자리를 옮긴 김봉호씨는 현재,노인복지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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