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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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화훼정보화마을 상예정보화마을 무릉도원정보화마을 수산정보화마을 알토산정보화마을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을 세움 옛날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문헌이 부족하여 상고할 수 없지만 돌칼, 돌도끼, 고인돌 등 선사시대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선사시대에 이미 이 고장에 사람이 살았음을 추측케 한다. 그러나 완전한 부락 형태가 이루어진 것은 조선조 세종 5년에 정의현이 현 성읍리로 옮겨지면서 부터인 듯하다. 전설에는 현씨가 이 마을을 설촌 하였다 하는데 호왕된 전설은 아닌 듯하다. 신풍과 신천에서 '선방터', '생개터', '선비장골', '선씨일뢰당' 등 현씨와 관련된 지명이 많고 또 신풍리에는 현씨가 처음 살았다는 집터도 있다. 본촌을 설촌했으리라 추정되는 玄漢亨(현한형)은 대를 알 수 없으나 그의 현손 玄致雲(현치운)이 만력무인생이라 묘비에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정의현이 성읍으로 옮긴 뒤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선이방, 선비장, 성장터등 지명에 거의 관직이 붙어 있었던 걸로 보아 현씨의 관리들이 퇴관하고 읍성과 가깝고 또 개로천에 식수가 풍부하여 차츰차츰 모여 살게 되지 않았는가 한다. 부씨, 변씨, 고씨도 살았던 흔적이 있다. 숙종 초에 吳致元(오치원), 吳啓元(오계원) 형제가 입주하였고 영조때 경주 김광수가 입주하였다. 그리고 조선 말엽에 최씨가 신천리에 입주하였으며 공산 김씨인 金漢旭(김한욱)이가 입주함에 이어 임씨·홍씨·김해김씨·청주김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호수와 인구는 시대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상술할 수 없으나 광무 8년의 기록인 「삼군호구가간총책」에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원래는 신풍 하천 두 마을을 '내끼'라 칭했었다. 원래는 한 마을이었다가 고종때 강학수 현감이 하천리를 분리시키고 속칭 '묵은가름'에서 현재의 위치로 부락을 옮겼다고 한다. 신천리는 마을 이름이 보여주듯 마을 형성이 늦게 되었다. 천미포란 때만 하여도 불과 5,6호였다고 한다. 아마 천미포란을 겪고 천미연대가 외적 방어상 더욱 중요시되어 많은 군사를 주둔시킴으로 인하여 호수가 증가되지 않았는가 한다. 신풍리는 吳(오)씨가, 신천리는 玄(현)씨가, 하천리는 姜(강)씨가 주성을 이루어 지금에 이르렀다.
마을 이름이 정하여짐 신풍, 신천, 하천 세 마을은 원래 내끼라 불리어졌다. '내의 끝 냇가'라는 뜻인 듯한다. 문자로 기록할 때는 내의 끝이라는 뜻을 따서 천미촌, 혹은 천미리라 기록하였다. 이의 최초의 기록은 처사 오억령묘비와 호장 강필번묘비에 보인다. 여기에서 말하는 내는 곧 천미천을 말하는데, 천미천은 천미촌이 이루어진 후 마을 이름 천미촌으로 인하여 다시 생겨난 이름이고 원래 이 내의 이름은 개로천, 진순내라 불렀었다. 조선왕조 초기에는 천미천의 동·서쪽에 몇 호씩 흩어져 살아 지금과 같은 집단부락은 이루어지지 못한 듯하다. 왕조 중엽으로 내려오면서 자연히 마을이 커지고 인구가 불어났다. 또 반상의 구별이 심하여짐에 따라 향족과 토족이 구별되기 시작하면서 향족은 내의 위쪽, 토족은 내의 아래쪽을 알내끼라 부르게 되었다. 천미포란 이후에 천미연대 부근에 마을이 이루어져 '새로 된 내끼'라는 뜻에서 신천리라 부르게 되었다 . 이 세마을, 즉 신풍, 신천, 하천을 통틀어 지금도 노인들은 '내끼'라 부르고 있고 신풍리를 상천미라 부르는 사람도 많다. 하천리와 신천리는 마을 이름을 바꾼 일이 없지만 상천리는 순조 철종 년간에 당시 대학자인 오진조가 오장헌의 패공고사를 따라 신풍리라 고쳤고 고종 말년에 마을을 둘로 나누어 신풍리, 신평리라 부르다가 다시 합쳐서 신풍리라 불렀다. 위에 적은 오진조의 문집에 정의풍촌이라고 적혀 있고 광무 8년에 기록된 삼군호구가간총책에는 신풍리, 신평리, 하천리라 적혀있다. 융희 2년의 호적단자에는 신풍리만 기록되고 신평리는 없다.
| 대 | 성 명 | 대 | 성 명 |
|---|---|---|---|
| 1 | 고 태 호 | 14 | 최 영 삼 |
| 2 | 최 권 식 | 15 | 강 창 현 |
| 3 | 현 원 우 | 16 | 고 복 신 |
| 4 | 김 태 옥 | 17 | 고 성 국 |
| 5 | 최 형 권 | 18 | 현 철 하 |
| 6 | 고 태 호 | 19 | 현 상 부 |
| 7 | 강 창 영 | 20 | 현 기 철 |
| 8 | 최 방 근 | 21,22 | 강 일 흥 |
| 9 | 현 종 언 | 23 | 이 창 복 |
| 10 | 현 광 옥 | 24 | 강 문 성 |
11 |
현 행 수 | 25 | 현 석 준 |
12 |
고 영 택 | ||
| 13 | 현 태 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