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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 68호
지정년월일 : 1979년 1월 23일
소 재 지 :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 782
이 가옥은 1901년에 건립하였으며 우진각 지붕 一자형 초가인데, 안거리·밖거리·축사 및 대문으로 구성되었다. 안채는 3칸인데 <큰방 >·<상방 >·<고팡 >·<부엌 >·<작은방 >이 있으며 뒷마루쪽으로 호령창이 있고 큰방과 접한곳에 아궁이(굴묵)가 있는데 아궁이와 부엌이 분리되었으므로 굴뚝이 따로 없으며 취사시 생기는 재는 비료로 사용된다. 가옥의 외벽은 외부온도를 차단하기 위하여 개구부(開口部)를 제외하고는 다공질 현무암으로 쌓고 틈새는 점토로 마감하였다. 지붕의 물매는 느리고 유연하게 처리하여 띄를 덮고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굵은 줄로 바둑판처럼 엮어 안정감과 강인한 멋이 풍긴다.
가옥은 마당을 중심으로 "口"자형으로 배치되었는데 우영으로 통하는 곳에 정낭을 두어 우(牛),마(馬)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으며 안채 동편에는 변소(통시)가 있고, 부엌 전면에 물독대(물팡)등이 있어 가옥 전체의 공간처리와 울타리의 경관 조화가 잘 보존된 제주도의 대표적 민가이다.
문화재청 자료 발췌
조 일훈 가옥 [趙 一訓 家屋]
예전 정의(성읍) 고을 객사와 가깝게 있던 객주집이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넓은 터에 안채(안거리), 바깥채(밖거리), 창고, 대문간(이문간), 안채와 바깥채 사이에 있는 모커리가 ᄆ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건물들은 모두 바람에 지붕이 날리지 않도록 새끼줄로 그물처럼 덮어 놓았다.
집의 가장 안쪽에 자리잡은 안채는 제주도의 전형적인 3칸형식이다. 구성은 가운데 칸에 대청, 대청 왼쪽에 부엌(정지)과 작은방(작은구들)을 두었고, 오른쪽에 안방(큰구들)과 곡물을 보관해 두던 고팡을 꾸몄다. 안방과 대청 앞으로는 반칸 툇마루를 두었다.
문을 들어서 오른쪽 곁에 있는 바깥채는 작은방과 툇마루를 놓지 않았을 뿐 안채와 비슷한 구성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농기구와 마소에 물을 먹이던 돌구유, 객주집일 때 쓰던 돈궤를 보관하고 있어 농가와 객주로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창고가 있는 자리에는 가축을 이용해 곡식을 찧던 말방애가 있었는데 지금은 헐어버려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개인의 집 안에 이와 같은 기구를 설치했던 예는 제주도에서는 보기드문 일로 농가의 특징을 한층 높이고 있다.
성읍 마을 중심가에 있는 전형적 전통민가로 객주집, 농가 시설 일부를 잘 보존하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전문설명 : 성읍조일훈가옥(城邑趙一訓家屋)
예전 정의(旌義)고을의 객사(客舍)였던 성읍초등학교 자리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그 남쪽에 위치해 있는 이 가옥은 본래 객주집이었다고 전해진다. 325평에 이르는 넓은 대지에 안거리(안채, 20평), 밖거리(바깥채, 18평), 모커리(안거리와 밖거리 사이에 가로 놓인 집채, 6평), 창고(10평), 이문간(대문간, 5평) 등 다섯채의 건물이 마당을 중심으로 ᄆ자로 알맞게 배치되었다.
창고가 세워진 자리에는 개인소유의 말방애(硏子磨)가 있었는데, 오늘날 헐어버린 이 말방애는 현주인인 조일훈씨의 조부가 건립했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가 독농가(篤農家)였음을 실증하는 바, 개인주택 안에 말방애를 설치했던 예는 제주도 안에서도 퍽 드문 일이었다. 많은 마소를 사육했었기 때문에 울타리 안에 마소를 매어두는 시설물이 설치되었었고, 마소를 매어 두는 공간과 안마당 사이에는 정낭( 門 을 대신하는 나무를 가로지르는 제주 특유의 시설)이 걸쳐졌었다. 지금도 정낭을 걸치는 데 쓰이는 ‘정주목 ’이라는 구멍 뚫린 돌기둥이 남아 있다.
밖거리에는 쟁기 두개를 비롯하여 재래적인 농기구들과 반닫이 몇개가 보관되어 있고, 마소에 물을 먹이던 돌구유 몇개도 마당 구석에 남아있다. 동전을 넣어 두는 돈궤가 보관된 것은 예전 객주집이었던 증거라 할 것이다. 안거리는 작은 방이 있는, 제주도의 전형적인 3간집이다. 곧 상방(대청마루)을 가운데에 두고, 한쪽에는 큰구들(안방)과 고팡(庫房)을, 다른쪽에는 정지(부엌)를 배치하는 3간집의 평면에 작은 구들을 정지 한쪽에 시설한 형태다. 안거리의 문들은 근래 많이 변형되었지만 주춧돌이나 풍채의 받침돌, 물팡(제주 특유의 물을 긷는 동이인 ‘허벅 ’을 얹혀두는 대석(臺石)) 등도 품위 있는 옛 민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가옥은 예전 고을 당시의 주요도로인 남문 길에 울타리를 두르고 있고,‘노다리방죽 ’이라는 남문 길 옆 작은 못과 대문간이 맞서고 있어 정의고을의 요소(要所)에 위치한 셈이다. 따라서 집으로 들어오는 기다란 좁은 골목인 ‘올레 ’는 없고 규모있는 대문간이 길가에 뚜렷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이 가옥이 마을의 요소에 배치되었으므로 서쪽 울타리 돌담에는 “참봉이기선휼궁비(參奉李奇善恤窮碑) ”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기도 하다. 18세기 말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이 가옥은 정의고을의 중심가에 있는 전형적 민가이고 예전 객사(客舍)와 이웃해 있는 객주집이면서, 근간에 이르러서는 독농가(篤農家)의 가옥으로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개인소유의 말방애(연자마)가 뜯겨진 점은 아쉽다 하겠으나 이 가옥의 특이성을 증거할 만한 시설과 민구(民具) 일부가 보존되어 있음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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