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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낳고 자라 죽음은 자연의 절대적인 법칙으로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자연적으로, 그러나 누구나 거역함이 없이 받아들이는 일생의 마지막 부분이 바로 죽는 것이다.
예로부터 척박한 물 가운데 섬인 이 땅에 살아온 선인들은 죽음의 의식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구좌읍의 각마을의 장례 풍속도 제주의 여늬 마을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장례절차를 이미 문헌화된 것들 중, 가장 보편타당한 것으로 1986년에 발간된 남제주군청의 남제주군지(南濟州郡誌)에서 발췌하기로 한다.
- 늙어지면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사후의 준비를 스스로 하는 의연함을 보인다. 물질적, 정신적 여유가 있는 사람은 늙어지면 관널과 개판, 수의와 장례에 소용되는 베 등을 마련하고, 미리 뫼자리를 봐두는 경우도 있다.
수의는 보통 명주로 짓되, 환갑이 지나면 윤년이나 윤월에 본인이나 자식들이 마련한다.
관널과 개판 등을 미리 준비하지 않은 경우에는 종명시 상주가 마련하기도 하고 급작스런 죽음인 경우, 다른 사람이 준비해둔 것을 양도받아 쓰기도 한다.
임종 시에는 가족이나 친족, 동네사람들이 모여 조용히 지켜보며, 원미죽을 마련하여 임종하는 이의 입에 떠 넣는다.
사망후 시신을 대강 정리한 다음에는 미리 죽은 이의 시신에 덮었던 저고리나 적삼을 가지고 지붕이나 마당의 높은 데 올라서서 초혼한다. 초혼하는 이는 담대하고 나이든 남자 어른이 맡는다.
초혼을 할 때는 북쪽을 향해 서서 왼손으로 죽은 이의 옷깃을 잡아 높이들고 관향과 성, 이름, 직함, 나이를 열거한 다음 '복'을 길게 부른다. 초혼은 세 번 반복해서 부른다.
이를 '혼 부른다'고 하며 이를 듣고 마을 사람들은 '장이 났음'을 알게 된다. 초혼이 끝나면 상을 차려 원미를 올리고 술을 부어 분향한 다음, 상주들이 곡을 한다.
염습은 향탕(향나무가지를 삶는 물)으로 하며 창호지나, 헝겊 따위를 적셔서 시신을 깨끗이 씻고 나서 물을 반드시 삼오방이 아닌 곳에 내버린다.
시신에 '호상옷'을 입히고 그 위에 '검은호상'을 덧입힌 후, 열두 자 짜리 베로 시신을 싸고 열 동강으로 묶는다.
입관 시 시신을 들기 위한 장치로 거관베를 미리 두 겹 두르고, 머리털과 손·발톱등을 깎아 넣은 소랑(혹은 대랑 다섯주머니라는 뜻의 오랑이라고도 한다)을 머리쪽에 둔다.
관은 목수를 청하여 상가 올래나 인근에서 짜고 이 때 칠성판 안쪽에 칠성을 새기는 예도 있다.
관을 짬과 동시에 상주들이 입을 상복 바느질이 시작된다. 사돈 집에서는 붉은 팥죽을 쑤어 허벅에 담아 따끈할 때 날라오면 상가에 모여든 모든 이가 요기를 한다.
관이 짜지면 입관을 하는데, 요에 해당하는 '지금'을 까라고, 이불에 해당하는 '천금'으로 시신을 덮은 후 마른 흙이나 모래을 넣어 만든 베개를 베개 하고 관의 빈곳을 죽은 이가 입던 옷으로 채운다. 그래도 빈 곳은 지푸라기 등으로 채워넣는데, 이를 포공(補空) 채운다고 한다. 다음으로 관뚜껑을 닫고 못질을 한다.
입관이 끝나면 상주들이 상복을 갖추어 입고, 복친이라고 하여 가까운 친족들에게, 또 동네사람들에게도 두건과 수건, 치마 등을 나누어준다.
입관 성복 후 성복제(成服祭)를 지내고, 발인 전날 신시(申時)에는 일포제(日哺祭)를 지낸다.
일포제날 조문을 하는 게 통례이나 구애받지 않고 문상객들은 부조를 들고 상가를 찾는다.
발인 전날 밤 택일된 시간에 토신제를 묘터에서 지낸다.
산터는 지관을 청하여 그동안 봐 놓으며, 광중은 장례날 새벽에 마을 장정들이 가서 미리 파 놓는다.
장례날은 정해진 시각에 발인하여 운상하고 하관을 하는데, 하관 전에 하관제를 지낸다.
봉분을 쌓고 '산담'을 두른다. (남제주군지, 남제주군청. 1986에서 발췌, 인용)
평대리에서는 장례치르는 날 '동네가 모인다'.
동네 모임은 상여접꾼이 모여들어 출상하여 운구하고 성분을 한 다음 산담을 쌓고서 해산을 한다.
성분을 할 때는 흙이 날만한 장소를 골라 작업을 하는데, 흙을 나르는 패, 봉분을 쌓는 패, 두 패로 나누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이 때는 노래를 부르고 술도 마셔가면서 노역을 하게 마련이다. 이를 두고 '질투굿'이라고 한다.
또한 상여운구 할 때에 상여 앞에 두 줄의 단포를 매어 접꾼이 늘어서고 가운데 선소리꾼이 서서 요령을 흔들며 소리를 하면 운구하는 장정들이 후소리를 받아 오금에 사기를 돋구웠다.
운구하는 과정에는 상여꾼들이 상여를 벋디뎌 세우고, 간다 못간다 우기면 상제들이 나서서 부조를 하곤 한다.
이 때에 친족들이 '필력'을 하기도 하는데, 떡이나, 수건, 양말, 등 속을 상여꾼과 장지로 가는 모든 이들한테 나누는 것을 말한다.
이즈음은 의례 간소화로 이러저러한 장례절차가 많이 생략되어 행해진다.
▶ 참 고
1 토종(토롱)
예전에 얼른 산터가 잡히지 않거나 상례날짜가 멀게 잡히는 경우 가매장을 했는데 이를 생빈눌 혹은 토롱이라고 불렀다.
관을 땅에 닿지 않도록 광을 파서 밑부분에 나무를 받치고 봉분은 만들되 그냥 둥그렇게만 쌓는다. 이렇게 가봉분을 만든 다음 '노람지'를 두르고 '주쟁이'를 씌워 놓았다가 날을 택하여 정식 매장을 한다.
이제는 사라진 예 장례의 한 풍속이다.
2 밖이서 죽은 영장
집을 나가서 죽은 경우, 시신을 집안에 들이지 않고 집 가까운 곳에 천막을 쳐서 빈소를 마련한다.
장례절차는 여늬 장례와 같다. 만일 집 밖에서 운명했다고 하더라도 너무 액장이거나 상주가 시신을 꼭 집에 들여야 한다고 우기는 경우는, 아직 숨을 거두지 않았다고 가장하고,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듯 방으로 모신 후 식사상을 차려놓는다. "어디 갔당 이제사 와서? 밥먹어."
등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하다가 사망했음을 알려 장례절차에 따라 장례를 치르기도 한다.
3 평대리는 대부분의 가정이 전통적인 삶을 사는 집안이다.
장례후, 죽은 이가 저승에 잘 가라고 한거리 굿을 하는데, 이를 '귀양낸다'고 한다. 이 때는 저승길을 치는 길을 닦는다는 의미의 굿거리인 '질을 친다.'
4 대소상
의식이 간소화되기 이전인 70년대 초반까지는 소상, 대상을 모두 치러 삼년상을 넘기는 게 통례였으나 그 이후 보통 만 1년만에 탈상을 한다. 그 이전에는 남편을 두고 부인이 먼저 사망하면 1년만에 탈상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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