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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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클럽(영어: night club)은 과거 암흑이 지배하던 유럽시대에서부터 전해진 클럽으로, 영국 최초의 국가 아발론의 건국자 아더왕에 대한 이야기인 '원탁의 기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클럽이다. 원탁의 기사가 바로 오늘날의 Night club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이 문서에서는 원탁의 기사로 시작된 나이트 클럽이 대한민국에 들어오기까지의 긴 여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원탁의 기사' 시대 ~ 십자군 원정[편집 ]
원탁의 기사들은 아더왕을 중심으로 랜슬롯, 개러헤드, 퍼시벌, 보호드, 라이오넬, 가웨인, 모드레드, 가웨인, 라이오넬, 케이, 헥터, 베디비어, 트리스탄, 캐러독이 멤버였는데, 이들은 술과 음식을 즐기며 아발론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 정사를 모의하곤 했다고 하며, 그 모임은 주로 밤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랜슬롯 경과 귀네비어 왕비의 불륜으로 아발론은 내란에 휩싸이고, 원탁의 기사들의 모임은 파국을 맞았고, 이 모임은 수세기동안이나 명맥이 끊어졌었다. 하지만 12세기 십자군 원정에 참가했던 전설적인 '익명'의 기사가 이 기사들의 모임을 다시 열었으니, 당대 사람들은 이를 Knight Party라 불렀다. 이 파티의 주 목적은 성지를 지키고, 이교도를 죽이기 위한 전략회의였다. 하지만 십자군에 맞선 위대한 군주 살라흐-앗딘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그 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오리엔트의 나이트 파티는 그저 풍문으로만 사람들의 입을 거쳐 전해지기만 했다.
십자군 원정 ~ 16세기[편집 ]
나이트 파티의 전설은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로 건너갔고, 수많은 이탈리아의 군벌귀족들[1] 은 이 전설적인 나이트 파티를 모방하여 용병부대를 만들어 이탈리아 전국에서 할거했다. 하지만 그 어떤 나이트 파티도 이탈리아를 통일왕국으로 만들어내지 못했고, 수많은 군벌 군주들은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16세기 나이트 파티는 북쪽으로 전해져 독일사람들에 의해 재해석되었다. 독일의 문호들은 이것들을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으나, 이를 주제로한 사람중 가장 유명해진 자가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 마르틴 루터는 신학공부를 하면서 나이트 파티가 과거 영국전설의 원탁의 기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원탁의 기사는 예수와 열두제자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고 할렐루야를 외치며 종교개혁의 의지를 실행할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독일의 부흥과 프랑스의 몰락[편집 ]
그 밖에도 수많은 독일인학자들은 이를 연구, 나이트 파티가 중시여긴 명예와 긍지와 기사도를 독일지방에 널리 퍼뜨렸고, 이 노력은 프러시아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에 의해 결실을 맺었다고 한다. 그는 이것을 바탕으로 근대 프러시아군을 형성, 우람한 체격의 근위대를 창설했고 이들은 훗날 프리드리히대왕의 프러시아군의 근간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독일인들이 나이트 파티를 딱딱하고 고지식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쯤 프랑스에서는 근엄한 바로크문화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바로크문화는 독일인들과는 달리, 근엄하면서도 화려한 파티의 일종으로 나이트 파티를 이해하려 했다. 이는 당시 프랑스왕실에 세를들어 살던 스튜어트왕조 구성원들에대해서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루이 15세가 등극한 뒤, 프랑스는 여성적이고도 화려함의 극치였던 로코코문화가 주류를 이루었고, 나이트 파티또한 이 로코코의 문화에 영향을 받아, 땀내나고 전쟁밖에 모르던 기사들의 모임이 아닌, 세련되고 미남들이 모여 사교활동을 하는 일종의 파티로 해석되었다. 덕분에 당시 프랑스에서는 귀족들이 원탁의 탁자에 모여 차를 마시는 것이 대 유행이였고, 군인들도 원탁위에서 작전회의를 했다. 이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명맥이 끊기도 말았다.
영국과 독일 간의 전쟁[편집 ]
이 시대 영국도 일대 변화를 겪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을 본받아 호프집 원탁에 모여 이야기를 했고 이는 당대 수많은 삽화들이 반증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의 하노버왕가가 영국을 지배하게 되자, 화려함과, 근엄함의 대결이 펼쳐졌다. 카톨릭의 뒤를 이은 영국 국교회에서는 과거 프랑스문화에 영향으로 독일문화를 질타했고 독일계 영국왕 조지1세는 국정에 참여하지 않고 방콕하기에 이르렀다.[2]
프로테스탄트들은 자신들이 부르짖는 무욕사상에 의거, 화려함보다는 고지식하고 재미없는 독일의 나이트 파티를 받아들였고 이들은 대거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주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새로운 아메리카 나이트 파티를 일구어 내는데, 아메리카 사람들은 과거 십자군조상을 받들어 자신의 신을 부정하는 야만인인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대결하였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훌륭한 자신들의 문화와 신앙을 갖추었지만, 기사도정신의 맹목적 추종자들인 백인들에 의해 추방되었고, 이들도 자신들의 독자적 나이트 문화를 활성화하려했으나 실패, 결국 백인들의 지배하에 집단거주지에 살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편집 ]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의 나이트 파티는 나폴레옹에 의해 재구성되었고, 나폴레옹1세는 신분에 의해 형성되는 나이트 파티가 아닌, 실력에 의해 형성되는 나이트 파티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 파티에 속해있는 자를 나파라고 불렀고, 동방제국에서는 그 수장인 나폴레옹은 나팔륜이라고 불렀다. 나파는 훗날 나빠로 순환되어 불러지고 있다.
나치에 의한 붐[편집 ]
나이트 파티는 그 후로 몇 세기 동안 사람들의 삶에 침투하여 있는 듯 없는 듯하였으나, 2차 세계대전 나치에 의해 다시 한번 폭발하고 말았다. 유태인들은 과거 자신들의 성지를 돌려주지 않은 십자군들의 나이트 파티를 부정했기에 과거 유럽에서 질타를 받았다. 하지만 나이트 파티를 신봉하는 나치파티는 유태인들을 부정 그들은 게토에 가두었다. 그래서 지금도 독일식 나이트 파티 신봉자들을 나치파가 순환된 나치빠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 들어온 나이트 파티, 그리고 현재[편집 ]
2차세계대전 이후 나이트 파티는 한국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과의 전쟁으로 지친 미군병사들은 조상들이 지켜오던 무욕의 나이트 파티정신이 아닌, 욕망의 나이트 파티를 한국에 전해주었고 이는 나이트 파티와 함께 들어온 프로테스탄트교와 젖절히 융합. 수많은 한국 프로테스탄트들이 하나님과 욕망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3]
한국의 욕망을 부르짖는 나이트 파티의 후계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비난이 심해지는 것을 감안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무한히 펼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오늘날 서울 번화가에 존재하는 Night Club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는 욕망에 가득찬 삐뚤어진 프로테스탄트들뿐 아니라 한몫잡기 원하는 깍두기들 또한 손을 대고 있다.
나이트 파티에 등장한 디제이[편집 ]
이집트에 탄생한 이집트디제이가 생기면서 나이트클럽이 부흥하기 시작한다. 그러고 디제이쿠까지 암고나매큐뭅을 외치며 가세하게 된다.
주석[편집 ]
도보시오[편집 ]
- 연세나이트클럽
- 나이트 오브 나이츠-나이트에서 자주 틀어준다. 진짜인지는 나도 몰라.